한신 타이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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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NPB) 센트럴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일본 한신지방 일대로,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소재한 한신 고시엔 구장을 본거지 구장으로 보유하고 있다. 구장 위치가 효고현 동쪽 끝. 그러니까 오사카부와 효고현의 경계 쪽에 있어서 '''사실상 간사이 지방의 대표구단적인 존재'''이며, 일본인들조차 오사카(大阪)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의외로 NPB 규약에 의한 보호지역(프랜차이즈)은 오사카가 아닌 효고현으로, 사실 오사카부 연고 프로야구단은 오릭스 버팔로즈다.[10] 고시엔 구장이 오사카에 있다는 말을 듣고 화내면 효고 사람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대충 오사카에서 고베 가는 길에 있다고 보면 된다. 오사카에서는 개막전과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에 고시엔 구장을 내줄 때에 한해 교세라 돔 오사카 경기를 열고 있다.
팀의 상징은 호랑이. 팀 컬러는 옐로우. 그리고 홈 유니폼의 버티컬 스트라이프 또한 특징이다[11] . 모기업은 '''이 팀 덕분에 먹고 사는 한신 전기철도다.'''[12] 덕분에 경기 열리는 날엔 한신 전철 카오스 확정.
일본프로야구 원년구단으로서 과거부터 이미 간사이를 대표하는 초인기팀으로 유명했고 최근에는 평균관중 1위를 기록할정도로 인지도와 관중몰이는 최고지만 그와 빈비례해서 '''팀의 역대 성적은 개판 5분전이다.''' 자국 두번째 규모의 도시 광역권으로 둔 인기팀, 역사가 긴 원년구단, 그의 비해 처참한 성적이 바다 건너 '''롯데 자이언츠와 매우 유사하다.''' 일본의 모든 프로야구 팀들 중 두번째로 오랜 기간 우승을 못한 팀[13] 이고, 8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센트럴 리그 우승 5회, 일본 시리즈 우승 1회 밖에 없는 '''근본만 남은 안습의 팀으로 유명하다.''' [14]
2. 구단 명칭
영문 표기는 HANSHIN Tigers로 해태/기아 타이거즈의 영향으로 한신 타이거'''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지만,[15] 구단 정식명은 어디까지나 탁점을 붙이지 않은 阪神タイガー'''ス'''로, 한국어로는 한신 타이거스라고 발음된다. 물론, 일본어 표기 때문에 한국어로도 한신 타이거'''스'''로 적어야 하는 건 아니다. 물론 한신 타이거스 측에서 원한다면 그렇게 적어주는 게 좋겠지만, 공식적으로 그런 요청이 들어온 것이 아닌 이상 딱히 강요할 필요는 없다. 한국의 프로야구 팀의 '스' '즈' 표기도 일본어로 일관성 있게 옮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16]
구단 이름에 걸맞게, WWF 일본지부와 협력하여 호랑이, 표범을 비롯한 고양이과 동물 보호 운동을 하고 있다. 실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이자 WWF 일본지부 회장인 도쿠가와 츠네나리도 한신 팬. 링크
3. 홈구장
홈구장은 '''효고 현 니시노미야시'''[17] 에 위치한 한신 고시엔 구장(阪神甲子園球場)으로 고시엔역 앞에 있다. 1924년에 지어진 야구장으로 한신 타이거스의 홈구장임과 동시에 고교야구의 성지라고 불리운다[18] . 이 때문에 철저한 개보수를 하고 있어 연식에 비해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다. 참고로 구장 내부도 구장 외부 못지 않게 고급스러우며, 내부는 리모델링 공사를 거치며 최근에 지어진 구장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최신 시설을 갖추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사다리꼴에 가까운 외야모양으로 세리그에서 나고야돔과 함께 투수구장으로 꼽히며, 내야가 전부 흙으로 덮인 유일한 일본프로야구 구장. 덕분에 내야바운드가 타 구장과는 이질적이라 내야수비가 허접한 것이 일종의 팀 컬러이다. 이 구장조건에 맞게 주로 내야안타를 잘 치는 발빠른 선수들로 타선을 꾸리고, 강력한 투수진으로 틀어막는 스몰볼이 팀컬러. 특히 불펜만큼은 대대로 남부럽지 않은 팀이었으며, 부족한 장타력은 FA영입이나 용병으로 메꾸는 경우가 많다.
제 2구장은 두 구장이 있는데 교세라 돔 오사카는 봄, 여름 고시엔고교야구 시합으로인해 홈개막시리즈와 8월 홈경기때 이용한다. 덕분에 죽음의 원정을 피할 수 있고, 고시엔보다 적은 수용인원으로 매 경기 만원시합으로 치룬다.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의 머스캣 스타디움은 연간 1회 혹은 2회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4. 유니폼
한신 타이거스/유니폼 항목 참조.
5.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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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간사이 지역에서 한신이 압도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 되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TV에서 볼 수 있는 야구 팀이 요미우리뿐이라 간사이에서도 요미우리 팬이 됐던 사람들이 많았고, 한신은 요미우리의 가장 오래된 라이벌로서 요미우리를 정말 싫어하는 사람들의 응원을 받는 정도의 팀이었다. 실제로 1980년대 초까지 고시엔에서 만원 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카드는 요미우리 전 뿐이었고, 1973년 한신의 에이스 에나츠 유타카가 연장 끝내기 홈런으로 자신의 노히트 노런을 완성했던 경기의 관중 수도 9000명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간사이 지역에는 한신 외에도 퍼시픽 리그의 난카이 호크스, 한큐 브레이브스, 킨테츠 버팔로즈가 있었고, 난카이가 5~60년대, 한큐가 6~70년대에 퍼시픽 리그를 씹어먹으면서 퍼시픽 리그 팀들을 응원하는 팬들도 많았다. 1959년 난카이 호크스가 일본시리즈를 우승하자, 오사카의 중심가인 미도스지에서 퍼레이드를 벌였을 정도.
1969년 한신의 연고지인 효고현을 기반으로 하는 선 텔레비전이 지역 연고 팀인 한신을 응원하는 야구 중계방송을 시작했고, 편성의 구애를 받지 않는 독립방송국의 이점을 살려 경기 전체 내용을 중계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관심을 얻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신의 인기가 점차 올라가던 중, 1985년 팀이 21년 만의 리그 우승과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자 간사이를 포함한 일본 전역에 '''타이거스 열풍'''이 불었고, 이를 계기로 한신은 간사이 대표 팀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90년대 이후에는 미디어의 발전으로 다른 팀의 경기를 보는게 쉬워졌고, 응원팀을 옮겨가는 일이 많아져서 요미우리 팬의 숫자가 좀 줄어들었으며, 퍼시픽 리그 팀들도 연고지 이전과 구단 합병, 성적 부진 등으로 인해 인기가 시들해졌다. 그리하여 간사이 지역 야구팬들의 민심은 한신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인기는 엄청 좋은데 성적이 시원치 않다는 점에서 인기는 성적순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는 구단이다.
인기가 많은 만큼 극성팬이 많다. 팀 선수가 특정 경기에서 활약하면 거의 찬양하다시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애정을 쏟아붓는 반면에 못하면 간판 선수고 뭐고 상관 없이 역적#s-5 취급을 하며 가루가 되도록 까는 것이 한신 팬들의 모토. 그 임팩트가 크면 클수록 더더욱 까인다. 그래서 2014년 일본시리즈 5차전 시합이 끝난 뒤 팀 내 인기 선수 중 하나인 니시오카 츠요시가 신명나게 까이고 또 까였다. 그 전 날엔 오승환이 까였다.[19] 그리고 2014년 일본시리즈 5차전은 소프트뱅크가 일본시리즈 우승을 확신하던 시합이었던 만큼 한신팬들의 분노가 절정으로 치솟아 있던 상태였던지라 후쿠오카 야후 옥션 돔 외야 쪽엔 분노로 가득찬 한신 팬들이 집어던진 것으로 추정 되는 무수의 한신 응원도구들이 쫙 깔려 있기도 했다.
특히 상황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마무리 투수라는 포지션 같은 경우, 오승환으로 예를 들자면 조금이라도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 한신팬들은 트위터나 2ch 실황 중계에서 기다렸다는듯 '''"마! 후지카와 데꼬 와라!💢"''', '''"오승환이 치아뿌라!💢"''' 등의 욕으로 도배 되었고, 한신-요미우리와 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일이 터지면 거의 반년이 넘도록 우려먹어지는데[20] 그 다음 날, 곧바로 퍼펙트 피칭으로 지난 경기를 만회하는 피칭을 하면 하루만에 태세전환을 하면서 '''"역시 한신 수호신은 오승환이야!"''', '''"승환이 대단해!"''' 라며 언제 그랬냐는듯 태도를 바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이 이들에게 있어서 흔한 일상이었다.[21]
한국의 롯데 자이언츠와 자주 비교 대상이 되는 센트럴 리그의 대표. 훌리건급의 열광적인 팬들을 가진 구단으로 유명하다. 거기다 지역밀착형이라 간사이 지방 사람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는 구단[22] . 이 반작용으로 성적만 안 좋으면 언론에서 가루도 안 남을 정도로 까이고 또 까이며, 뭇 간사이인들의 술안주가 된다. 정말 바다 건너 롯데 자이언츠 그 자체. 오죽하면 간사이 지방을 빗대서 '''한신국(阪神国)'''이라는 소리까지 나온다.
어느 정도냐 하면 팀 성적이 바닥을 긁던 1990년대 말에도 '''"홈팀 좌석에 빈 자리가 좀 보이더라"''' 레벨이었고[23] 팀 성적이 좋아진 2000년대에는 '''원정팀 좌석을 제외하면 무조건 꽉 찼다.''' 하지만 그 전에 막장 감동님들이 지휘권을 잡던 시절이나 팀성적이 바닥을 헤메던 1980년대 중후반~1990년대 중후반에는 관중 동원력이 떨어져 그 넓은 고시엔 구장의 절반가량을 공기로 채우고 경기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를 기억하는 올드팬들로부터는 "그때는 아무 때나 가도 표가 있었는데 요새는 성적이 좋아지니까 표 구하기가 힘들어졌다."면서 배부른 푸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카와사키 구장처럼 외야가 황량해도 나가시소멘을 먹는다든지 마산 야구장처럼 외야가 널럴해도 삼겹살을 구울 순 없다.
한신 타이거스 팬 자격시험을 '''돈을 받고''' 보기도 하며, 예상 문제집을 만들어서 팔기까지 한다. NPB 구단 중 유일하게 특정 팀만을 위한 게임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름하여 '한신 타이거스 DS'라고.
때문에 우승 한 번 했다 치면 간사이가 난리가 난다. 2003년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했을 당시에는 오버좀 섞어서 전 도시가 세로줄무늬(한신 유니폼)로 칠해졌었으며, 우승 기념으로 출시된 세로줄무늬에 한신 엠블렘이 박혀있는 '''한신 우승 기념 게임큐브 한정판#'''[24] 이 순식간에 매진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게임큐브의 제작사인 닌텐도의 본사가 간사이 지방인 교토에 위치하고 있어서 만들어진 한정판. 사실 이 한정판은 당시 닌텐도 사장이었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올해 한신 우승하면 게임큐브 한정판 제작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던 것에 대한 실제 제품에 해당된다[25][26]
그 인기가 높은 만큼 시구자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하는데, 그 방탄소년단의 정국이 2017년 시구를 하고[27] 멤버 7인 전부가 전부 1루 덕아웃에 서기도 하여 간사이권에서 화제가 되었다.# 이 때 멤버들의 싸인볼이 고시엔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28]
2017년 기준 평균관중수 4만2천 명대로, 거인을 2위로 따돌리고 일본 1위에 올랐다. 전 세계로 봐도 한신보다 평균관중이 많은 팀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뿐이다. 전 세계 평균관중 2위의 초거대 팬덤을 보유한 야구팀.
5.1. 팬덤
칸사이와 오사카 일대가 한신팬이 많아서 어지간한 야구팬이 아니라면 되도록 한신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원래 오사카 자체에서 한신 타이거즈가 매우 유명하기에 오죽하면 '''한신국'''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이고, 이자카야, 밥집 등지에선 한신경기 중계는 항상 틀어져 있고 오사카시에서도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꽤 있을 정도로 한신의 인기가 상상초월인 야구단이다.
괜히 한신 관련 얘기를 꺼냈다가 밤새도록 한신 얘기를 지겨울 정도로 듣게 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외국인"이 한신 팬이라는 걸 알면 아마 크게 놀라면서 밤새도록 같이 술마시며 롯코오로시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한신이라 가능한 이야기인데, 일본에서 야구를 보다보면 야구장에 혼자 오는 사람을 꽤 많이 볼 수 있지만 혼자 온 관중끼리 스스럼없이 대화를 틀 수 있는 구단은 아무래도 한신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29] 타 구단 팬이라고 다 그런건 아니지만, 보통 초면 및 타인에게 조심스러운 일본인 특성상 같은 구단을 응원한다고 해도 옆사람에게 쉽게 말 걸면서 대화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케이스이다. 하지만 한신팬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한신에 대한 팬심을 공유하고자 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 일본의 TV등에서 여러 사례로 증명되어 있다. 참고로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실제로 한 실험으로, 오사카 지역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한신 얘기를 하고 있으면, 옆에 앉아있던 생판 처음 보는 다른 사람이 매우 높은 확률로 대화에 끼어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한신 관중석에 혼자 앉아 있다고 해도 분위기가 좋아지면 초면인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타 구단에 비해 월등히 높을 수 있으니 참고하자.
특히 한신팬들은 유니폼에 와펜을 붙여서 치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타팀팬들에 비해 와펜을 붙인 유니폼이나 핫피를 입은 관객의 수가 월등히 많다. 심지어 바지도 맞춰서 상하의 전부 와펜 등으로 치장한 사람도 많다. 군부대 근처에 자리한 오바로크사들처럼, 고시엔 근처의 가게나 전문업체에 맡겨 붙이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팬심과 유명세에 비해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역대 성적 탓에, 구단 직원들 중에서도 "솔직히 말해서 역사가 긴 팀이고요, 간사이에 있고요, 무엇보다 '안티 거인'이라는 이유로 살아남고 있는 팀이죠."라며 평가하는 사람까지 있다. 또한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한테 "너무 인기가 좋은 팀이라서, 그리고 우승할 수 있는 팀으로 가고 싶습니다."라는 이유와 자유계약 신분인 선수들에게는 "이적 이후 호성적을 기록하면 영웅취급 해주다가 조금이라도 부진하면 이 팬덤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는 것이 무섭다."라고 한다.
심지어 한신이 KBO 리그 출신 용병을 많이 데려오는 이유가 '''일본 선수들에게 기피대상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폭로까지 나왔다. 신인선수들 및 유망주에게도 "전통적으로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조금 주며 성에 차지 않으면 더이상 기회도 안주는 구단" 이라며 기피한다고 한다. 다만 이는 확실히 걸러 들어야 할 것이, 그럼에도 한신은 꾸준히 좋은 신인을 배출하고 있으며 대형 FA또한 2~3년 걸러 한 번은 꾸준히 터트리는 팀이다. 한신의 저런 극성인 점을 싫어하는 선수도 많지만, 반대로 인기팀인 만큼선수 본인이 한신 팬인 경우도 많은데다(특히 간사이 출신이면 백이면 백이다) 빅클럽이라 돈도 두둑히 줘서, 싫어하는 선수도 많지만 가고 싶어하는 선수는 더 많은, 오히려 선호도가 높은 구단이다. 일본에도 만연한 찌라시와 찌라시의 기사를 필터링없이 그대로 수입하는 국내언론이 퍼트리는 루머.
성적이 좋지 않던 1990년대에는 "민주당과 한신의 공통점이 뭔줄 아냐? 집권할 능력도 안 되면서 집권당(야구에서는 요미우리)의 라이벌을 자처한다는 점"이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6. 관중수 추이
7. 구단 역사
구단 창단은 1935년. 그러니까 요미우리 자이언츠, 주니치 드래곤즈 등과 더불어 일본프로야구 원년 구단 중 하나이다. 창단 당시의 이름은 '''오사카 타이거스(大阪タイガース)'''. 1940년에 당시 적대국이었던 미국과 영국의 언어인 영어를 쓰지 말자는 운동이 일어나 이름을 '''한신군(阪神軍)'''으로 바꿨으나 태평양 전쟁 패전 후인 1946년에 이름을 다시 '오사카 타이거스' 로 환원했다. 그러나 팀명 연고지(오사카)와 실제 연고지(효고현 니시노미야시)가 일치하지 않았기에 1961년에 구단명에서 오사카를 빼고, 그 자리에 모기업 약칭이자 연고지역의 광역권인 한신을 붙여 지금의 '''한신 타이거스(阪神タイガース)'''로 바꿨다.
센트럴리그 팀들 중 유일하게 마이니치 오리온즈 가입에 찬성했던 구단이다. 그러다 리그가 분열할 모양새가 보이자 '마이니치의 프로 참여는 인정하지만 우리는 자이언츠와 같은 리그에 뛰겠다' 라고 하며[31] 찬성 측 중 유일하게 센트럴리그에 참가한 구단이 되었다.
그러나 열광적인 팬에 비해 솔직히 과거 성적은 초라할 정도. 그래도 1970년대까지는 주니치와 더불어 요미우리의 독주에 딴죽을 거는 라이벌이었지만, 우승 경력은 믿을 수 없을만큼 적은데, 만년 2위 주니치 드래곤즈나 답 없기로 유명했던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조차 두 번 해본[32] 일본시리즈 제패를 이 유명한 구단이 '''딱 한 번'''[33] 한 것은 지금도 일본의 미스테리. 카케후 마사유키-랜디 바스-오카다 아키노부 클린업을 앞세운 1985년에 한신의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34][35] 이게 감이 안온다면 KBO 리그에서 가장 오랫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는 롯데 자이언츠는 2번이나 우승을 했고 최근의 우승이 1992년이다[36] . 더 치욕적인 사실은 1982년 KBO 리그 창설 이래 원년 구단들 중 1번만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거나, 1980년대 이후 한국시리즈를 우승하지 못한 팀들은 '''아무도 없다.''' 그나마 유일하게 한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팀이 삼성 라이온즈인데 구단 첫 우승을 1985년, 즉 한신과 동년에 이뤘다. 다만 차이점은 한신은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룬 것이고 삼성 라이온스는 전후기 통합우승을 해서 당시 규정상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고, 때문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은 2002년이다. 후술했지만 유일한 1회 한국시리즈 우승팀인 한화(게다가 이쪽은 1986년 창단. 즉 원년 구단은 아니다)마저 1999년에 우승을 한 실정이다. 재정난으로 해체한 현대 유니콘스조차 4회 우승으로 현대 왕조를 이뤄냈고, 롯데 자이언츠의 뒤를 잇는 최장기간 한국시리즈 비우승팀들인 LG 트윈스나 한화 이글스도 모두 90년대에 우승을 맛본 팀들이다[37] . 여기에 2010년대에 창단[38] 한 NC 다이노스가 2020년에 첫 우승을 했다. 일본 국내로 눈을 돌리면 라이벌 퍼시픽리그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창단 9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뤄내는 역사를 만들었을 정도다[39] . 메이저리그 팀들의 경우 1980년대 이후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하고있는 팀들을 꼽자면 뉴욕 메츠[40] , 볼티모어 오리올스[41]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42] , 그리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43] 가 있다[44] . 더 심하면 1979년 이후 월드시리즈 우승이 없는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있기도 하고, 이해 히로시마 토요 카프가 처음으로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다. 1948년 이래 우승 못해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도 있으니 치욕스럽진 않으나 적어도 1번이상 우승을 했던 기록이 있는 팀이어서 한신과는 전혀 다른 레벨에 속한다. 게다가 KIA 타이거즈,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 호랑이를 구단 이름으로 사용하는 구단들 가운데 마저도 꼴지를 기록중이다.[45]
주니치는 그렇다 치고,[46] 센트럴 리그 3약으로 분류되는 야쿠르트(일본시리즈 우승 5회), 히로시마(일본시리즈 우승 3회), 요코하마(일본시리즈 우승 2회)보다도 일본시리즈 우승 횟수가 적다. 1985년 한신의 우승으로 충격받은 일본인 중 하나인 소설가 타카하시 겐이치로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優雅で感傷的な日本野球)'''>라는 소설을 써서 내놓기도 했다. 한국과 비교하면 키움 히어로즈, kt wiz가 아직 한국시리즈 우승을 해내지 못했지만 2000년대 창단된 팀들이며, NC의 우승 전까지 KBO의 유일한 1회 우승팀이었던 한화 이글스도 1999년이다... 메이저리그 소속팀들 가운데 2020년까지 우승하지 못한 팀들이라면 텍사스 레인저스, 콜로라도 로키스, 시애틀 매리너스, 그리고 밀워키 브루어스, 그리고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그리고 탬파베이 레이스가 있긴 한데... 메이저리그는 30팀이 월드시리즈 우승을 놓고 겨룬다. 고작 12팀 밖에 안되는 NPB와는 또 다르다.
더욱 충격적인 건 1985년 폭풍간지로 센트럴리그 - 일본시리즈 우승을 따놓고 그 다음 리그 우승은 무려 18년이 지나서 호시노 감독 2년째인 2003년이란 것이다(…). 2003년 우승[47] 때는 그 고이즈미 총리까지 떠벌릴 정도로 나라에 난리가 났었다. 더 웃기는 건 고이즈미 총리는 '''카나가와현''' 출신이다.
리그 우승도 1950년 양대리그제로 나뉜 때부터 따지면 5회뿐이다. 이는 2리그 분할 이후로 따져서 센트럴리그 6개 구단중 5위. 아래로는 현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뿐이다.[48] 60년대 후반 전까지 시민들이 성금 모아서 간신히 연명하던 히로시마 카프보다도 리그 우승 횟수가 적다.[49] 거기다 2003년까지는 통산 승률이 5할 아래로 밑돌 정도였었다.
2021년 2월부터 여자 야구 팀을 설립한다.# 프로야구 구단이 여자 야구 팀을 설립한 것은 처음이다.박동희 : 대통령이 4번 바뀔 동안[50]
한국시리즈 우승을 못한 팀은 롯데가 유일하다. 1992년 이후로 대통령이 4번이나 바뀌었다.누마자와 : (한신은) 1935년 창단해 1985년 딱 1번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했다[51]
. 대통령이 몇 번 바뀌도록 우승을 못했다고? 4번? (한숨을 내쉬며) 한신은 수상이 '''18번'''이나 바뀌도록 우승을 하지 못했다.[52] 2008년 박동희 기자와 한신의 누마자와 쇼지 본부장의 인터뷰에서.#
8. 응원
오사카 타이거스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응원곡인 '''한신 타이거스의 노래(阪神タイガースの歌)''', 일명 '''롯코오로시(六甲おろし)'''가 유명하다. 이 곡이 처음 나왔을 당시 제목은 '''오사카 타이거스의 노래(大阪タイガースの歌)'''였는데, 1962년에 팀 이름이 한신으로 바뀌면서 자연히 제목도 한신 타이거스의 노래로 바뀌었다.자세한 것은 한신 타이거스/응원가참조
9. 징크스?
9.1. 프랜차이즈는 해설이나 해!
불구대천의 숙적 요미우리가 감독 선임에서 까다롭기 그지없는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대로 구단의 선수출신들이 감독을 맡으면 팀이 막장화되는 경향이 있어서[54] 구단에서 활약했던 스타선수들이 은퇴하고 감독을 맡는 것을 팬들이 달가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2009년에 부임한 마유미 아키노부 감독은 야구의 급격한 예능화로 2011년 시즌을 끝으로 경질돼버리고 말았고 그 뒤를 이은 와다 유타카는 2012 시즌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했을 뿐더러 2014년엔 가울야구를 너머 일본시리즈 한 번 나가면서 그럭저럭 체면치레는 했다지만 재임기간 내내 예능야구와 정상야구를 왔다갔다 했다. 그러고 와다 뒤의 카네모토 토모아키는 그야말로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 & 외야수 출신 감독은 망한다 & 프랜차이즈가 감독 맡으면 팀이 망한다 이 세 속설을 한 번에 증명하고 말았다.''' 그래도 요미우리랑은 다르게 순수 한신 성골만 감독직에 앉는 것이 아니다. 2010년대 한신 감독들 중 아예 타 구단 커리어가 없던 사람은 '''성골''' 와다 유타카가 유일했으며 나머지 마유미 아키노부, 가네모토 도모아키, 야노 아키히로는 전부 타 구단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고 한신으로 이적한 선수들이었다.
1962년의 양대리그 이후 첫 센트럴리그 우승과 2년 뒤인 1964년 센트럴리그 우승은 '''요미우리 출신'''의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 밑에서 거두었다. 1985년의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은 팀 레전드인 요시다 요시오 감독 밑에서 일구어냈지만 불과 2년만에 최하위로 전락하면서 막장화. 그 후 무라야마 미노루[55] -나카무라 카츠히로[56] -후지타 타이라-그리고 돌고 돌아 다시 감독을 맡은 요시다 요시오 등등 선수시절에는 팀을 대표하던 스타들이 줄줄이 감독을 맡았지만 돌아온 것은 길고 긴 암흑기. 1987년부터 2002년까지 16년간 6-6-5-6-6-'''2'''-4-4-6-6-5-6-6-6-6-4. 중간에 2(1992년)가 하나 보이기는 하지만 그 주변 성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뭔가가 잘못돼서''' 1년 반짝한 거다.[57][58] 무엇보다도 최하위인 6만 10번을 찍었다.
그 후 야쿠르트를 4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세리그의 신흥강호로 만든 데이터야구(일명 ID야구)의 대가이자 '''난카이 호크스 출신'''인 노무라 카츠야 감독을 기용하면서 3년 간의 리빌딩을 거쳐[59] , '''주니치 드래곤즈 출신'''인 호시노 센이치를 데려오고 나서 첫 해인 2002년은 비록 B클래스인 4위로 끝났지만 2003년 18년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거두면서[60] 이 시기를 기점으로 대대적인 명예회복에 나서기 시작했다. 2003년 세리그 우승 후 2005년 오카다 아키노부 휘하에서 또다시 세리그 우승을 거두었지만 닛폰시리즈에서 참패했다. 2010 시즌까지 A클래스(3위권)를 유지하는 등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밑에 2008, 2013년 시즌 요약을 보면 알겠지만 상위권에 있었다고 해서 막장기가 안 보였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 회복세도 거듭되는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의 삽질로 빛이 바래던 중에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오카다 아키노부에 이어 또다시 구단 OB인 마유미 아키노부가 2009년부터 감독을 맡으면서 다시 안습 상황이 되어 버렸다.[61] 설상가상으로 2007년부터 2008년까지 활약했지만 결국 마유미 감독에 의해 방출되었던 외국인 투수 라이언 보겔송[62] 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가서 괴물급 활약을 했었다. 그것도 지톸ㅋㅋㅋㅋ를 대신한 5선발로.
이 때문에 '''같은 간사이 지방의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감독이 되고 나서 킨테츠와 닛폰햄의 두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끈 '''명장''' 나시다 마사타카 감독을 선임하자는 주장이 팬들 사이에서 나왔고 보도매체에서도 그렇게 전망[63] 했으나 웬걸. 오카다-마유미에 이어 구단 OB인 와다 유타카 타격코치를 감독으로 선임하며 OB 감독으로 3연타를 날렸다. 과연 와다 감독이 다시 한신을 일으켜 세워서 OB 감독 막장화 징크스를 털어낼 것인지 아니면 198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까지 계속 된 암흑시대 시즌 2를 찍을지 귀추가 주목되었으나...2012년 와다 감독은 우려했던 대로 센트럴리그 5위를 찍으며 한신의 흑역사를 찍고 있다. 특히 2012년 한신 타선은 아예 멸종된 상태라, 10게임 연속 2득점 이하라는 굴욕적인 기록까지 선보였다. 특히 타코 출신이라는 와다가 지휘봉을 잡은 뒤 마유미 시대보다 타선이 더 폭망해[64] , 결국 시즌 후반에 접어들며 팀이 리빌딩에 들어간 상태.
그리고 2013년엔 그나마 정규시즌 2위로 올라섰으나, 주니치도 아닌 오랫동안 얼굴을 못 내민 승률 5할도 안 되는 3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발리고 광탈. 2014년에는 2013년의 수모를 되갚고 숙적 요미우리를 4연승으로 일축하면서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여 지긋지긋하던 플레이오프 징크스를 털어내나 했더니 일본시리즈에서 우세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1차전 승리 뒤에 내리 4연패로 또다시 일본시리즈 우승에 실패했다. 게다가 니시오카 츠요시의 3피트 라인 룰 위반에 따른 수비방해라는 사상 초유의 막장플레이로 시리즈의 막을 내리면서 모처럼 분전했던 2014년도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며 마무리했다. 이어진 2015년에도 1위인 상태로 9월에 돌입했으나 이제 신 가을의 풍물시라고 불릴만큼 고질화된 막판 붕괴로 3위로 추락. 그 와중에 야쿠르트의 14년만의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에서 조력자 노릇이나 하고, 히로시마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패하면서 시즌의 운명을 히로시마 손에 맡기는 상황까지 연출했다. 결국 히로시마가 시즌 마지막 경기를 진 덕분에 어부지리로 간신히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결국 와다 감독도 2015년 시즌을 끝으로 경질되었다. 그리고 나서도 이번에는 OB에 외야수이기까지도 한 카네모토 토모아키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2016년 코치경력도 없던 카네모토호는 B클래스를 기록했으나, 2017년 시즌초 1위까지 올라갔으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약진과 한신의 DTD본능[65] 이 겹치며 잠시 추락, 공동 2위까지 내려갔으나 3~6위 팀들을 잡으며 8월말 단독 2위의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가을야구 경험 부족 및 우천중단 크리를 맞고 다음해를 기약해야 했다. 시즌 종료 후 주전 유격수였던 야마토가 요코하마로 이적하고, 장타력 보강을 위해[66] 한화 이글스에서 윌린 로사리오를 영입했다. 그러나 로사리오는 한국 프로야구의 개막장 타고투저의 수혜자였음이 드러났고 2017시즌 막판에 싹수가 보이기 시작하던 유망주들은 죄다 퇴보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폭망해서 2001년 노무라 카츠야 시절 이후 '''17년만에 최하위'''를 기록했다. 그렇다고 노무라 시절하고 비교하면 안 되는 게 그 때는 10년동안 비밀번호를 찍어서 황폐화 된 팀을 재건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가네모토는 우승을 목표로 선임한 감독이다. 이미 노무라의 후임인 호시노 시절 이후로는 우승이 목표이고 목표 달성을 위해서 그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게 풍족하게 지원을 해 준 가운데 기록한 최하위로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성적을 거두면서 이 팀은 프랜차이즈 스타가 감독을 하면 팀이 망한다는 사실만 재확인했다.
그리고 2018년 시즌 종료 후 포수였던 야노 아키히로가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구단은 니시 유키를 사왔다. 다행히 시즌 마지막에 연승으로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를 탔으나, 요코하마를 이기고도 요미우리에게 패했다. 2020 시즌에는 3위를 차지했지만 하필 2위가 지난 7시즌간 B클래스던 주니치...
9.2. 국제대회
여담으로 올림픽, WBC 등 국제대회에 선수가 차출되어 나가면 꼭 한둘씩 망가져서 돌아오는 안 좋은 징크스가 있다.
10. 안티 요미우리
일본 프로야구 최대 인기 구단이라 할 수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항하는 전선의 선봉은 단연 요미우리에 맞먹는 팬덤을 보유한 한신이라고 볼 수 있다.[67] 이 둘의 라이벌리는 전통의 일전이라 불린다. 2016년 기준 평균관중은 요미우리가 42,172명으로 일본프로야구 1위, 한신 타이거스가 41,276명으로 일본프로야구 2위를 기록했으며, 양쪽 성적에 따라 순위가 오갈 정도로 치열하다. 각종 매체에서도 한신은 요미우리의 라이벌로 묘사된다.
관동 지역 한신 팬의 반감은 더 유난맞아서, 도쿄 돔 뿐만 아니라 관동 쪽에서 벌어지는 원정 경기에는 상대가 야쿠르트든 세이부든 상관 없이 응원단이 일단 '''"죽어버려 요미우리 아자아자" (くたばれ読売 それいけいけ)'''[68] 부터 부르고 시작할 정도.[69] 한편 한신과 요미우리가 맞붙는 날에는 도쿄돔 스피커에서 나오는 요미우리 응원가인 '투혼을 담아(闘魂こめて)'의 하이라이트 부분 가사인 "가자 가자 나아가자(行け 行け それ行け)"는 한신팬들이 '''쌩목'''으로 외치는 '''"죽어 죽어 죽어버려(死ね 死ね くたばれ)"'''에 묻혀버릴 때가 많은데, 한번은 이게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방송사고가 터져버렸다.[70] '''그것도 교진군 홈구장 도쿄돔 한복판에서.'''
그리고 한신 타이거스의 레전드 투수인 무라야마 미노루[71] 는 요미우리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72][73] 으로 인해 계약금을 4배나 더 주겠다는 요미우리의 러브콜을 걷어차고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을 만큼 선수부터 팬까지 요미우리에 대해서는 아주 살벌한 팀이다.
한신과 요미우리의 대립 구도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는데, 프로야구 최초의 구단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신인 '거인군'이고, 다음으로 한신 타이거스의 전신인 오사카 타이거스가 생겼다. 또한, 일본프로야구 출범 원년인 1936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프로야구가 중단되기 전인 1944년까지 우승을 기록한 팀은 요미우리와 한신, 둘뿐이었다. 한신은 요미우리의 우승을 3회(1937, 1938, 1944년) 저지했다. 양대리그제가 시행된 1950년 이전을 기준으로 해도 우승구단은 요미우리, 한신, 킨키 그레이트링[74] 등 셋뿐이다. 지역 배경으로는 관서의 한신과 관동의 요미우리라는 대립 구도가 성립한다. 한국에 비유하자면 호남의 해태 타이거즈 VS 영남의 삼성 라이온즈/롯데 자이언츠라 할 수 있다.
11. 미디어
두말할 것 없이 간사이 미디어계를 먹여 살리는 화수분이자 영원한 신문 1면 주제. 간사이권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대중 인기가 높은 만큼 시즌 중, 오프시즌을 막론하고 미디어에서의 주목도와 화제성 모두 '''압도적'''이어서 간사이권 준키국 지상파 야구중계 중 대부분이 한신 중계다. TV 방송 와이드쇼에서는 연예, 시사가 중심이 되는 다른 지방[75] 과 달리 한신 타이거스의 스프링캠프와 연습경기 실황이 아침부터 생중계되기도 하며[76] , 한신 출신 해설자와 현역 지도자, 선수가 와이드쇼와 뉴스에 나와 경기 해설 및 비평을 한다. 웬만한 정보 및 뉴스 프로그램에선 한신 담당코너가 따로 있으며, 심지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관련기업인 '''요미우리 TV'''가 앞장서서 최초의 한신 응원 프로그램 '주간 토라토라 타이거스'를 따로 만들기도 했다. 라디오 중계에서도 마이니치 방송과 아사히 방송[77] 이 시즌 중 매일 저녁마다 한신 편파중계를 하며 비시즌에 야구 없을 때도 한신 등 야구 이야기를 한다. 독립방송국인 선 텔레비전의 경우 아예 <선테레비 박스석(サンテレビボックス席)>으로 원정, 홈 경기 모두 한신전이 시작될 때부터 종료될 때까지 중계하여 간사이에 사는 한신 팬들은 모바일, 인터넷 중계[78] 를 보지 않는 이상 유료방송 서비스에 가입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홈그라운드에서의 높은 방송중계 접근성은 그 어떤 구단도 따라올 수 없는 강점.[79] 요미우리는 지상파에서도 중계가 줄고 니혼 TV도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끊는 경우가 많아 간토 살더라도 유료방송으로 본다.
스포츠신문의 경우에도 간사이권의 1면은 한신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 고베신문사의 자회사인 데일리스포츠[80] 는 '''꺾이지 않는 데일리'''[81] 라고 불릴 정도로 독보적인데, 웬만하면 한신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뤄 주고 전직 편집장이 '''"지구가 거꾸로 돌아도 1면은 한신"''''#이라는 코멘트를 할 만큼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경기 결과, 이치로의 3천안타, 일본시리즈 우승 소식, 심지어는 '''정권교체'''[82] 도 가뿐히 제끼고 웬만하면 한신 소식이 1면이 된다. [83] 그래서 TV 아사히의 인기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분노신당'에서도 2013년에 토픽으로 다뤄지기도 했다.#[84] 광고주도 한술 더 떠서 진격의 거인 전시회 광고를 데일리스포츠 1면에 실어 놓고 "한신팬들에게는 약간 저항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는 드립을 친다.
12. 이야깃거리
NPB 역사상 최단시간 시합과 최장시간 시합 기록을 모두 가지고 있는 구단이다.
최단시간은 1946년 7월 26일의 '''55분'''(쇼치쿠 로빈스 전).
최장시간은 1992년 9월 11일의 '''6시간 26분'''(야쿠르트 스왈로스 전). 참고로 한국프로야구기록은 최단시간 1시간 33분, 최장시간 5시간 58분.
1952년 연고지 제도 확립 후 12구단 중 홈구장을 옮긴 적이 없는 유이한 팀이며[85] , 양대리그제 시행 이전 현재까지 남아있는 6개 구단 중 유일하게 돔구장을 홈구장으로 쓰고 있지 않다. 오사카 돔은 코시엔 때 쓰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팀의 홈은 고시엔이다.
예전에 비해 FA영입 등에 돈을 많이 풀고 있는데 용병, 일본 내 FA 중 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대어를 낚아대는 바람에 히로시마 구단 팬들과 미묘하게 사이가 안 좋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4번타자이자 재일교포인 카네모토 토모아키라든가 아라이 타카히로라든가, 앤디 시츠 등 이상하게 히로시마 제들을 데려오면 대박 성공. 때문에 농담으로 히로시마는 한신의 팜(2군)이냐 라는 소리까지 나오는 실정(...). 어쨌든 이런 투자 확대 등으로 현재는 과거의 강호의 이미지 회복에 성공했다. 근데 우승은?(...)
그 예로 2003 시즌과 2005 시즌에 세리그 우승으로 일본시리즈에 진출했지만 2003 시즌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게, 2005 시즌에는 당시 이승엽이 소속된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4전 전패의 치욕을 당하고 또다시 준우승에 머물렀다. 게다가 2005년 일본시리즈에서는 4게임동안 총 득점 4대33으로 처절하게 발렸다.[86]
호시노가 건강문제로 사임한 뒤 오랫동안 2군 감독을 맡으면서 지도자 수업을 받은 구단출신 오카다 아키노부가 감독자리에 오르게 된다. 오카다가 감독을 맡은 2005년에 다시 리그우승을 하지만 대부분의 평가는 '''노무라-호시노가 남겨준 유산 덕분'''. 다만 센트럴 리그는 우승했지만 그 해 일본시리즈는 그야말로 '''쫄딱 망했다.''' 2006년, 2007년에도 우승전선에는 뛰어들었지만 뒷심 부족으로 주니치, 요미우리에게 우승을 넘겨주고 말았다.
일본 야구계의 양대 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신죠 츠요시와 이가와 케이가 선수생활을 시작했던 구단이기도 하다.
포켓몬스터의 야빠 캐릭터 나진이 좋아하는 에레브스는 바로 이 한신 타이거스를 모델로 한 야구팀이다. 이미지 컬러가 노랑이고 세로 줄무늬[87] 가 특징이며, 성적이 안습한 점이 유사하다.
대운동회의 야나기다 이치노가 팬으로 항상 노란색의 검은 줄무늬 손수건을 들고 다니며 유니폼 잠옷을 입고 방에 마크가 걸려 있다.
[image]
일본 만화의 신이라 불렸던 데즈카 오사무도 한신의 팬이었다고 한다. 1950년의 연하장에는 "한신이 부진해서 야구만화 그릴 생각이 안 든다"(!)라고 적었을 정도였다. 연하장에 꼬박꼬박 한신 유니폼을 입은 호랑이를 그려서 보낸 건 기본. 저렇게 푸념한 1950년이 마침 호랑이 해인 경인년이기도 해서 연하장에다 데즈카 선생이 그린 호랑이 마스코트가 바로 위의 그림이다.
유명 성우이자 가수 미즈키 나나도 아버지의 주입식 교육[88] 덕분에 한신 타이거스의 골수팬. 특히나 야노 아키히로 선수의 팬이라고 하며 콘서트에서 직접 사인을 전달받고 기뻐서 눈물을 흘린 에피소드도 있다. 여러모로 애착이 강한지 '다 함께 롯코오로시' PV[89] 도 찍고 시구도 하고 절찬리에 한신빠 인증을 진행중이다.
일본 방송계에서도 굴지의 한신 빠로 알려져 있는 치아키라는 여성 탤런트는 아예 '''"어렸을 적엔 요미우리 선수들을 '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집안 자체가 골수 한신 팬 집안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요미우리에 대한 편견을 지운건 성인이 되어 방송계에 입문한 후 은퇴한 요미우리 출신 선수들과 관계를 갖게 된 뒤부터라고 할 정도. 물론 지금도 2017 롯코오로시 영상에도 출연했으니 한신팬인건 어디 가지 않는다
메이저리그 진출 실적은 영 좋지 않은 편이다. 이가와 케이는 '''양키스에 악몽을 남기고 돌아왔고,'''[90] 후지카와 큐지는 가서 별 활약없이 망해서 돌아왔다. 그나마 성공한 케이스가 세실 필더와 오승환 정도. 그러나 둘 다 외국인 선수인데다 세실 필더는 원래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선수였고, 오승환은 도박 사건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케이스라...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되어 있는 작품중엔 호텔 퀸시라는 제목으로 정발된 컨시어지라는 만화에 골수 한신팬이 등장한다. 퀸시호텔 사장인 마츠오카 슌이치로와 그 일족들인데, 아예 이 캐릭터가 개그하는 장면의 90%는 한신 관련일 정도다. 작중에서도 4컷만화의 소재[91] 로 쓰이기도 하고, 본편에도 한신관련 소재는 심심하면 등장하는 수준.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시리즈의 제작사인 파워프로 프로덕션도 한신과 밀접한 관서지방에 있어서인지 제작진 대부분이 한신빠이다. 그래서인지 시리즈 대대로 한신 타이거즈의 선수들은 실제의 활약상보다 능력이 좋게 나오는 편. 그러다보니 페넌트레이스 모드에서도 거의 만년 상위권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오토타케 히로타다가 가장 좋아하는 야구팀이다.
작고한 성우 타테카베 카즈야도 생전에 열혈 한신 팬이었다고 전해진다.
아즈망가 대왕의 등장인물 타키노 토모가 한신의 열성팬이다. 그런데 미하마 치요가 요미우리의 팬인지라 http://blog.naver.com/pianndi/1002284594이걸 가지고 대차게 놀린다. [92]
노랑색, 검정색, 회색을 팀컬러로 쓰고 있고 이중 노랑색을 메인 팀컬러로 쓰고 있지만, 정작 양대리그 창설 이후로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한 해엔 유니폼에 노랑색이 들어간 적이 없었다.[93] 이것도 징크스랄지 뭐랄지...
12.1. 한국선수 영입 낚시
유독 한국 선수를 영입하겠다는 의사를 언론에 많이 흘리지만 실제로 영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가 드디어 오승환을 영입했다.
- 이승엽 : 일본 진출 시 영입의사를 표시했고,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계약이 끝날 때 쯤 또한번 미끼를 던졌으나 결국 영입하지 않았다. 오히려 2005년 일본시리즈에서 이승엽에게 호되게 얻어맞으며 스윕을 당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4번타자로서 센트럴리그에 합류한 이승엽의 충실한 샌드백 역할을 했다.[94]
- 김동주 : 2008년, 첫 FA를 맞이한 김동주를 영입하고 싶다는 보도를 흘렸으나 결국 김동주는 두산과 계약했다.
- 이택근 : 일본 언론에서 베이징 올림픽 이후 한신이 이택근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보도했지만 나중에 사실무근이라는 정정보도를 냈다.
- 김태균 : 소문 뿐이었다. 결국 치바 롯데 마린스로 갔다.
- 이범호 : 소문 뿐이었다. 결국 후쿠오카 소프트뱅크로 갔다.
- 임창용 : 소문 뿐이었다. 결국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갔다. 이후 야쿠르트와의 계약이 끝날 때 한신이 엄청난 거액을 준비중이라는 이야기가 기정사실처럼 퍼졌으나 임창용 본인이 미국무대 도전을 원하여 시카고 컵스로 떠났다.
- 이대호 : 소문 뿐이었다. 결국 오릭스 버팔로스로 갔다. 그리고 2013년 이대호가 일본야구에 적응하고 펄펄 날아오르자 한신이 2013년 이후 오릭스에서 FA가 되는 이대호를 관심깊게 지켜보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결국 2013년 12월 5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계약에 합의했다.
- 김광현 : 2009년자 보도로 2015년 김광현의 FA를 대비하여 한신이 무려 6년동안의 장기 영입 프로젝트를 준비중이라는 초특급 설레발기사가 나왔다.
- 오승환 : 2013년에 FA가 되는 오승환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소식에, 일본 언론쪽에서 한신이 시즌후 구단동의 해외FA가 가능한 오승환에 대해 영입조사를 착수했다는 기사가 떴다.# 위의 경우와는 달리 신빙성이 뒷받침 되는 이유는 2012시즌부로 한신을 떠난 마무리투수 후지카와 큐지와 오승환의 스타일이 상당히 닮았기 때문이다.[95] 오승환의 경우는 위의 경우와 또 다른 것이 시즌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계속해서 언론을 통해 오승환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으며 오승환을 보기 위해 단장인 나카무라 카츠히로가 직접 내한했고, 이제는 오승환 영입을 위해 7억엔이라는 실질적인 금액과 대우까지 제시한 상태이다. 결국 2013년 11월 22일, 2년 최대 9억엔 조건으로 계약에 성공.#
- 손승락 : 오승환이 팀에서 떠날때를 대비해서 오승환의 대체선수로 손승락을 눈여겨보고있다는 닛칸스포츠의 기사가 나왔다.#
- 양현종 : 손승락과 비슷한 맥락으로 오승환이 한신을 떠날 걸 염두해두고 앞서 거론 된 김광현과 더불어 양현종에게 눈독 들이고 있다며 일본 언론은 언플질을 했다.#
- 김현수, 최형우 : 2015년 들어서 김현수와 최형우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떡밥을 흘렸다.##
- 이대호 : 시애틀과의 계약만료 후 미국에서 주전이 아니라면 아시아로 돌아온다는 설이 나왔다. 일본에선 소프트뱅크나 지바롯데, 라쿠텐, 한신 등이 언급되었고 특히 한신은 연봉 5~6억엔처럼 구체적인 액수까지 언급되었다. 하지만 이대호가 요구한 풀타임 1루수 출전을 받아들이지 못해 결렬되었다.
한국에서 뛰었던 외국인 선수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기도 하는데, 그 사례가 윌린 로사리오와 제리 샌즈. 샌즈의 경우에는 2019년 키움 히어로즈의 시즌 종료 이전이었던 8월부터 한신 당기관지인 데일리스포츠 등을 통해 야노 아키히로 감독의 코멘트까지 첨부한 영입검토 기사가 나와서 키움 팬들이 속앓이를 해야만 했다.[99] 결국 샌즈를 데려갔고, 만족스러운 활약을 보이는 중.
이렇게 영입한다는 말만 많은 이유는 재일교포가 많은 간사이권을 연고지로 하고 있는데, 또 돈도 많은 구단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모기업은 작지만 구단이 자체적으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고 그만큼 팀에 투자도 많이 하는 것. 전통적으로 오사카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일본에 살아온 재일들이 많이 사는 동네로 한국계 팬도 무시할 수는 없는 숫자를 이루고 있고, 구단에도 많은 재일교포 출신 스타들이 있어 한국리그 출신 선수들을 자주 재보는 것. 실제로 오승환이 활약하던 시절 오사카에서 인기가 상당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빅클럽이다 보니 한국 선수들을 이리저리 재보다가도 결국 싸지만 도박인 한국리그 출신 선수보다는 비싸더라도 검증된 메이저리그 출신 선수 혹은 일본내 타 팀 출신 선수로 마지막에 가서 발길을 돌리게 되고 마는 것. 돈은 충분히 있는데 굳이 도박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그 외에 이승엽이나 이대호같은 정말 검증된 선수의 영입경쟁에서는 한신보다 더 돈이 많은 교진이나 호크스 같은 구단에 돈싸움으로 밀리는 경우도 있고. 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에서는 양치기 소년 이미지를 갖게 된 구단이다.
2020년은 코로나로 마이너리그가 중지됨에 따라 선수를 검증할 곳이 없고 한국리그 출신인 샌즈의 어느 정도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어 2020년 오프시즌에는 한국리그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고, 멜 로하스 주니어와 라울 알칸타라를 영입하며 성과를 거뒀다.
12.2. 켄터키 할아버지와의 악연
1985년 센트럴리그 우승 후의 에피소드 때문에 35년 동안 우승을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 커넬 샌더스의 저주 항목을 참조. 고시엔에도 KFC 매장이 있다.
13. 시즌별 성적
항목이 길어져 분리했다. 한신 타이거스/시즌 참조. 2005년부터 기록.
14. 대표적인 선수들
14.1. 현역 선수들(2020년 기준)
14.1.1. 투수
14.1.2. 포수
14.1.3. 내야수
14.1.4. 외야수
14.2. OB
14.2.1. 영구결번, 준영구결번
이하 굵은 글씨는 '''영구결번'''.
- 10. 후지무라 후미오 : 초대 미스터 타이거스로 사랑받았던 한신의 프랜차이즈 스타. 호쾌한 장타로 홈런타자의 이미지가 강했던 선수로 일본프로야구 양대리그 이전 일본 야구연맹 시절부터 1950년대까지 한신을 이끌었던 클럽하우스 리더이기도 했다. 물론 당연히 구단 최초의 영구결번자다.
- 23. 요시다 요시오 : 우시와카마루(牛若丸)란 별명에서 볼 수 있듯 투쟁심 강한 선수. 요미우리의 히로오카 타츠로와 '세기의 명 미기(美技)'를 다툴 정도로 유명한 센트럴리그의 명유격수다. 또한 1985년 한신 타이거스의 유일한 우승을 이끈 감독이다.
- 11. 무라야마 미노루 : 일명 자토펙 투수. 역시 한신의 전설적인 투수로 양대리그 이후 대졸 출신으로서는 유일무이한 통산 200승 투수(통산 222승)이기도 하다. 특히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불꽃튀기는 명승부가 유명할 정도로 교진군 킬러이기도 했다. 이 선수는 그냥 요미우리 킬러도 아니고 입단 전부터 '골수 한신팬+반 요미우리'를 표방했는데 얼마나 대단했냐 하면 입단교섭 당시 요미우리가 한신보다 4배나 많은 계약금을 제시했음에도 요미우리를 뻥차버리고 한신에 입단했을 정도였다.
- 53. 아카호시 노리히로 : 1번타자로 활약하며 많은 안타와 도루를 기록하였으나, 안타깝게도 2009년 시즌 종료 후 잦은 부상의 여파로 생긴 중심성척수증후군이라는 희귀병으로 인해 조기 은퇴하게 되면서 아카호시의 번호를 준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 6. 카네모토 토모아키 : 연속이닝 출장 기록은 물론, 한신 타이거스의 2000년대 중흥기를 이끈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2012 시즌이 끝나고 영구결번을 지정하기로 했으나 카네모토 본인이 고사하면서 일단은 준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참고로 한신의 6번은 나름 의미있는 번호인데, 한신의 역사를 빛낸 교타자인 후지타 타이라와 와다 유타카가 썼던 번호이기도 하다.
14.2.2. 출신 선수들
- 가네다 마사야스 (1942 - 1944, 1946 - 1957)
- 오창정 (1944, 1946 -1949)
- 타미야 겐지로 (1949 - 1958)
- 미야케 히데시 (1953 - 1967)
- 고야마 마사아키 (1953 - 1963)
- 야마우치 카즈히로 (1964 - 1967)
- 에나츠 유타카 (1967 - 1975)
- 타부치 코이치 (1969 - 1978)
- 에모토 타케노리 (1976 - 1981)
- 후지타 타이라 (1966 - 1984)
- 나카무라 카츠히로 (1972 - 1982)
- 고바야시 시게루 (1979 - 1983)
- 마유미 아키노부 (1979 - 1995)
- 한신 타이거스의 전설의 클린업 트리오 : 랜디 바스-카케후 마사유키-오카다 아키노부
- 와다 유타카 (1985 - 2001)
- 야기 히로시 (1987 - 2004)
- 세실 필더 (1989) : 프린스 필더의 아버지. 일본프로야구에서 홈런왕을 차지한 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도 홈런왕을 차지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 신조 츠요시 (1990 - 2000)
- 토마스 오말리 (1991 - 1994) : 랜디 바스, 맷 머튼 다음 가는 커리어를 자랑하는 한신 용병타자. 은퇴한 뒤에도 한신에서 스카우트, 타격 코치 등 여러 자리를 맡아 맷 머튼을 발굴하는 등의 성과를 거뒀다.
- 히야마 신지로 (1992 - 2013)
- 시오타니 가즈히코 (1993 - 2001) : 2006년 SK 와이번스에서 뛴 적이 있다. 한신 시절에는 실패한 타자 유망주였다.
- 야부 케이이치 (1994 - 2004)
- 스캇 쿨바 (1995 - 1996)
- 세키모토 켄타로 (1997 - 2015)
- 이마오카 마코토 (1997 - 2009)
- 하마나카 오사무 (1997 - 2007)
- 이가와 케이 (1998 - 2006)
- 야노 아키히로 (1998 - 2010) : 2000년대 한신의 홈플레이트를 굳건히 지킨 안방마님.
- 벤 리베라 (1998 - 1999)
- 후쿠하라 시노부 (1999 - 2016)
- 고지행 (2000 - 2001)
- 버디 카라이어 (2001 - 2002)
- 후지모토 아츠시 (2001 - 2009)
- 사쿠라이 코다이 (2002 - 2011)
- 안도 유야 (2002 - 2017)
- 시모야나기 츠요시 (2003 - 2011)
- 제프 윌리엄스 (2003 - 2009) : 후지카와, 쿠보타와 함께 막강 계투진 JFK(한신)를 형성한 호주 출신 좌완. 단 미첼 리포트에 이름이 오른[106] 약물 복용 혐의자이다. 일본 야구계를 떠날 때 통산 141홀드를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 NPB 통산 홀드 기록이었다. 이후 요미우리의 캐나다인 투수 스캇 매티슨이 깨기 전까지 외국인 기록이기도 했다.
- 이라부 히데키 (2003 - 2004)
- 쿠보타 토모유키 (2003 - 2014) : JFK(한신)의 일각을 이루었던 우완 투수.
- 토리타니 타카시 (2004 - 2019)
- 제이미 브라운 (2005)
- 쉐인 스펜서 (2005 - 2006)
- 마에다 야마토 (2006 - 2017)
- 라이언 보겔송 (2007 - 2008)
- 카네무라 사토루 (2008 - 2009)
- 아롬 발디리스 (2008 - 2009)
- 맷 머튼 (2010 - 2015)
- 아라이 료타 (2011 - 2017)
- 니시오카 츠요시 (2013 - 2018)
- 마우로 고메즈 (2014 - 2016)
- 마리오 산티아고 (2015)
- 윌린 로사리오 (2018)
- 얀가르비스 솔라테 (2019)
14.3. 구단출신 메이저리거[107]
- 신조 츠요시 (뉴욕 메츠-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뉴욕메츠): 월드시리즈에 출전한 최초의 일본인 선수다.
- 야부 케이이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이가와 케이 (뉴욕 양키스 - 일본 복귀 후 오릭스 버팔로즈)
- 후지카와 큐지 (시카고 컵스)
- 오승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토론토 블루제이스-콜로라도 로키스)[108]
14.4. 흑역사
- 루퍼트 존스 : 원조 "바스의 재래". 랜디 바스의 공백을 메꾼답시고 데려왔지만 53경기동안 2할 5푼의 타율에 8홈런을 때리는 데 그쳤다.
- 마츠나가 히로미 : 한큐 브레이브스의 호타준족 스위치 히터 3루수였으나 한신에게는 강렬한 먹튀. 1992 오프시즌에 대형 트레이드로 데려왔으나 부상으로 부진한 성적을 거둔 뒤 이적한 지 1년만에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FA 선언 선수가 된다. 여기에 팀을 떠나면서 "한신 고시엔 구장은 유치원의 모래밭"이라는 한신 디스 발언을 남겼다...라는 보도가 나와 한신 팬들을 분노하게 하기도 했다.(나중에는 오보로 밝혀졌다.) 게다가 그의 대가로 한신에서 오릭스로 보낸 우완 포크볼러 노다 코지는 이적 첫 해 17승 5패 2.56 209탈삼진으로 맹활약했으며, 1995년에는 1경기 19탈삼진의 일본 최다기록을 세우기도 하는 등 5년 가까이 오릭스의 주축 선발투수로 활약하며 95, 96년 리그 우승에도 공헌하였다.
- 마이크 그린웰 : 불과 8경기 뛰고 몸에 공을 맞은 후 신이 야구를 그만 하라고 계시를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만 남기고 귀국해 버렸다.
- 케빈 멘치 :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박찬호와 한솥밥을 먹었던 적이 있는 거포. 중심타자로서의 활약을 기대하고 데려왔지만 24경기밖에 뛰지 못했다.[109]
- 브룩스 콘래드 : 그 많고 많던 외인 타자 중 유일하게 단 한 타점도 기록하지 못한 타자.
- 에가와 스구루 : 한신에 입단할 뻔 했던 투수. 에가와 사건으로 인하여 역지명제도가 나왔으며, 고바야시 시게루가 한신으로 트레이드된다.
- 오승환 : 활약은 뛰어났으나...
- 윌린 로사리오 : 2019년 기준 가장 최신버전(?) 바스의 재래. 2년 8억엔에 데려왔지만 2할 4푼에 8홈런, OPS 6할 대를 기록. 결국 1년만에 계약을 중도해지당해 퇴출당했다. 이 때문에 제리 샌즈 영입시 한신팬들이 심각하게 우려하기도 했다.
- 33-4 : 이건 할 말이 없다. 한신한테는 큰 흑역사이고, 이후 바비 발렌타인 롯데 감독도 보스턴 레드삭스의 흑역사가 된다.
15. 역대 감독
도쿄의 라이벌 팀하고 비교해보면 팀과 감독들이 얼마나 막장이었으며 역대 감독 리스트가 얼마나 난잡한 지 실감할 수 있다. 팀내 파벌다툼 및 정치구도의 변화에 따라 한번 물러난 감독들이 폭탄돌리기 식으로 앉고 또 앉고 해서 한 감독의 임기가 1차, 2차로 나뉘는 건 비일비재하고, 요시다 요시오의 경우에는 3차 임기까지 있을 정도. 1996년까지는 툭하면 시즌 도중에 감독이 교체되거나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경질되는 감독도 많았다. 그래서 2000년대 이전까지 감독 리스트에 있는 감독 대부분의 임기가 2년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16. 역대 성적
17. 둘러보기
[1] 가장 왼쪽에 있는 호랑이 마스코트이며, 호랑이를 뜻하는 일본어인 토라(虎)와 '행운(lucky)'을 합친 이름이다.[2] 가운데에 있는 작은 호랑이 마스코트. 한신의 어린이 팬을 상징한다.럭키의 동생이다.[3] 가장 오른쪽의 분홍색 모자를 쓴 호랑이 마스코트, 키타의 누나이다.[4] 얼마나 오래됐는지가 감이 안 잡힌다면 KBO가 창설된게 1982년이다. 게다가 한국 프로야구 팀들 가운데 가장 오래도록 우승을 하지 못한 롯데 자이언츠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이 1992년이다. 아울러 호랑이를 구단명으로 쓰는 한, 미, 일 3개국 구단들 가운데 우승횟수에서도 꼴찌다.[5] 참고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더불어 헤이세이 연간에 일본시리즈 우승이 단 한차례도 없었다.[6] 양대리그 출범 이전[7] 해방 전 평양을 대표하는 투수였다. 둘째 동생 박현덕은 동산고등학교 야구부를 창설했고, 막내 동생 박현식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 다만 본인은 남북 분단 이후 북한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기억에서 잊혀졌다. # 당시 기록. 해방 전이기 때문에 이름이 일본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한자를 음독하면 박현명 그대로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8] 재일교포 3세로 일본명은 가네무라 다이유(金村大裕). 특별정주자에 해당하며 귀화를 하지 않아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2군급 선수로 통산 1군 기록은 2009년 1군 1경기 1이닝 5타자 2볼넷 1탈삼진 무실점. 이후 2011년 한국 SK와이번스에서 선수생활을 했으나 1군 승격 없이 1년만에 방출되었다. 2020년 현재까지 한국야구 마지막 해외교포선수 제도로 입단한 선수.[9] 세실 필더는 한신에 오기 전에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전한 경력이 있으므로 제외한다.[10] 한신 타이거스는 원래 오사카 대표로 창단된 역사를 갖고 있지만 홈구장 위치 탓에 1952년 보호지역 제도가 도입된 이래 계속 효고현을 보호지역으로 삼고 있다. 2004년 오사카 연고의 긴테스 버팔로즈가 효고현 연고 오릭스에 흡수되면서 3년간 두 팀에 오사카부를 더블 프랜차이즈로 부여한 적이 있으나, 2008년부터는 다시 효고현만을 보호지역으로 하고 있다. 다만 오릭스가 원래 고베 연고이던 터라 서로의 이해가 맞아 양 지역에서의 활동에는 서로 협조하고 있다.[11] 세로로 된 줄무늬이다.[12] 모기업은 한큐한신홀딩스. 그래서 2000년대 경영 통합 이후 타카라즈카 가극단과 함께 한큐한신의 엔터사업의 쌍두마차이기도 하다. 일본판 빌보드 차트의 제작 및 배포를 담당하는 곳도 한신 전기철도의 자회사인 한신 콘텐츠링크.[13] 처음이자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이 1985년으로, 1984년 우승이 마지막인 히로시마가 1년 더 오래되었다. 문제는 히로시마는 일본 시리즈 우승 3번, 리그 우승 8번으로 한신보다 사정이 그나마 좀 낫다는 것...[14] 오릭스는 일본 최악의 비인기구단으로 악명이 높다. 성적도 요즘은 나쁘지만 전체를 보면 왕조를 구축한 적이 있을 정도로 우승 경험은 한신보다는 많다. 참고로 이 두 팀은 사실상 동년에 태어났다. 한신이 1935년 12월, 오릭스가 1936년 1월. [15] 심지어 한국 영업중인 한큐한신토호 계열사에서도 한신 타이거즈로 부른다.#[16] 세이부 라이온즈는 구단명에 탁점이 붙어있어 해당 사례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17] 일본에서도 고급 주택가이고 오사카에서도 가까우며 치안도 좋아 살기 좋은 동네이다. 하지만 경기 있는 날 한신고시엔역을 필두로 한 고시엔 구장 주변은 '''말 그대로 개판으로 바뀐다.'''[18] 1924년은 십간십이지 상으로 갑자년이기 때문에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19] 자세한 사정은 2014년 일본시리즈 항목을 참조.[20] 대표적인 게 2014 일본시리즈에서 소프트뱅크 나카무라에게 끝내기 쓰리런을 맞은 경우, 2014년 7월 요미우리와의 홈경기에서 대타로 나온 다카하시 요시노부에게 역전 홈런을 맞았던 경우 등.[21] 사실 강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런식의 선수 취급은 딱히 한신만의 문제도 아니고, 일본만의 문제도 아닐 뿐더러, '''야구만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22] 한신이 오랜 기간 간사이를 대표하는 센트럴 리그 구단이었던 것도 있지만 오사카 부근의 다른 야구 구단들이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거나, 아예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연고지나 구단명을 왔다갔다하는 등 밉상짓을 하거나 해서 지역 야구팬들의 관심이 집중된 탓도 있다.[23] 엄밀하게는 노무라가 취임하고 한신팬들에게 희망고문을 시작한 시기부터 이 정도.[24] 보통 큐브보다 정가가 1만 엔 가량 비쌌다.[25] 그런데 닌텐도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한정 닌텐도 64를 판 적도 있었다.#[26] 참고로 닌텐도의 본사 소재지는 교토로 도쿄가 아닌 간사이권에 본사를 둔 몇안되는 유명 기업중 하나이다.[27] 투수판에서 던졌는데 구속이 100km/h를 넘긴 것 같다는 구단 관계자의 전언이 있다.[28] 고시엔은 10대 야구선수들이 한 번쯤 서보고 싶은 로망이기도 한데, 정국은 고교를 졸업한 해 마운드에 섰다![29] 타 지역에도 영국의 펍 문화처럼 한신팬들이 모이는 이자카야 등이 있다. 매년 고시엔을 방문하는 샤다라빠의 웹툰 "고시엔으로 고!"에서도 고시엔에서 어느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한신을 좋아한다고 하니 굉장히 반가워 했다고.[30] 7년 만에 총 300만 관중 돌파[31] 애초에 최대 라이벌이 자이언츠인데다 한신 - 자이언츠 전이 사라지면(교류전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다) 그만큼 인기와 흥행을 보장하기는 힘들게 된다.[32] 심지어 센트럴리그 우승도 먼저다! 전신인 타이요가 1960년 처음으로 우승했는데 한신의 첫 우승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962년(...) 게다가 타이요는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가자마자 바로 우승했는데 한신은..[33] 현존하는 일본 구단들 중에서 비교적 빨리 일본시리즈 우승한 어린 구단과 함께 가장 적다.[34] 참고로 이 해 우승은 그해 8월 일본 항공 123편 추락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구단 사장 나카노 하지무의 영전에 바치는 선물이기도 했다.[35] 심지어 무려 1세기동안 우승을 못했던 어느팀마저 2016년 우승을 했다.[36] 게다가 첫번째 우승조차 한신보다 1년 먼저이다.[37] LG 트윈스: 1990년, 1994년; 한화 이글스: 1999년[38] 2012년 창단, 1군 진입은 2013년.[39] 창단: 2004년/일본시리즈 우승: 2013년.[40] 1986년[41] 1983년[42] 1984년[43] 1989년[44] 그럼에도 이 팀들은 한신보다도 우승횟수는 더 많다. 상세하게 설명하면 메츠의 86년도 우승은 구단 사상 2번째, 오리올스의 83년 우승은 구단의 3번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84년도 우승은 구단의 4번째, 애슬레틱스의 89년도 우승은 구단의 9번째 우승이었다. 다저스도 있었지만 2020년 우승으로 탈출.[45] 이와는 반대로 '자이언츠'를 구단명으로 사용하는 3개국 팀 가운데는 반도의 구단이 꼴찌를 기록중. [46]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감독직에서 물러난 2011년 이후 팀이 약체화되면서 완벽한 약체로 몰락했다.[47] 자력우승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여지가 남아있던 야쿠르트를 요코하마가 박살내면서 자동 우승을 거두었다. 한신이 경기 쉬고 있는데 숙소에서 만세...는 아니고 매직 넘버가 2 남은 상태에서 같은 날 경기가 있었지만 한신은 낮경기, 야쿠르트는 야간 경기로 시간대만 달랐을 뿐이다. 그래서 경기를 이기고도 선수들과 팬들은 고시엔에 남아서 야쿠르트 vs 요코하마 경기 결과를 보았고, 요코하마가 승리하면서 18년만의 우승이 결정되자 코시엔에서 우승 세리머니를 했다.[48] 그나마 요코하마는 1960년, 1998년 두 번 한 리그 우승에서 모두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해서 한신보다 일본시리즈 우승 횟수가 많았으며, 2017년 후쿠오카에게 패하기 전까지는 일본시리즈 승률 100%였다. 게다가 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진출한 일본시리즈 승률은 여전히 100%다.[49] 히로시마는 총 8회. 1975, '''1979''', '''1980''', '''1984''', 1986, 1991, 2016, 2017(볼드체는 '''일본시리즈 우승년도''')[50]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2020년 현재는 박근혜와 현직 문재인이 추가되었다.[51] 롯데 자이언츠가 1982년 KBO 리그 원년 멤버로서 1984년 우승까지 불과 2년이란 기간이 지났고 '''이것 또한 구단의 첫번째 우승'''이다. 1935년 창단해 1985년, '''무려 50년이란 기간을, 그것도 구단의 유일한 우승'''기록인 한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에어컨 앞에서 부채질하는 형국인 것이다. 물론 1949년까지는 일본시리즈가 없었기에 실질 햇수는 35년이지만 그래도 정말 오랫동안 우승 못한 건 사실이다.[52] 이건 일본의 내각제 하의 불안정한 정치체제도 한몫 했는데, 대통령이 임기를 수행할 동안 수상이 몇 번씩이나 바뀐 적도 있었다.[53] (원래 올라와있던 영상이 저작권 문제로 한국 IP 시청이 불가능해져 일본시리즈 V1을 달성한 해인 1985년 버전으로 교체함.) 참고로 해당 버전을 부른 사람은 아사히 방송의 전직 아나운서이자 한신 타이거스의 광팬으로 유명한 도죠 요조(道上洋三). 이 사람은 2000년엔 오케스트라 버전까지 불렀다. 유튜브 롯코오로시 항목에선 보통 토죠상 버전이라고 나와있다. 그 외에도 오프시즌에 이따금씩 한신 타이거스 광팬인 예능인들이 직접 롯코오로시를 부르는 공식 영상도 있다. 보통 롯코오로시 뒤에 연도 입력 후 검색을 누르면 ○○ 버전이라고 나오는 식이다.[54] 멀게는 후지무라 후미오, 가네다 마사야스 항목 참조.[55] 참고로 1970~1972년에도 플레잉 매니저(감독 겸 선수)를 맡은 바 있다. 그러나 성적 부진을 이유로 1972년 선배 가네다 마사야스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그해를 끝으로 선수로서도 은퇴했다.[56] 한신-오릭스에서 감독이나 프론트 직을 맡으면서 맡은 트레이드나 FA, 외국인 선수 영입 등에서 재미를 본 적이 거의 없고 오히려 내보낸 선수들이 맹활약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래서 일본에서의 별명은 이름 '카츠히로'를 비튼 '마케히로'. 이 정도로 한심한 감독임에도 의외로 팀 역사 상 가장 긴 임기를 기록한 최장수 감독이다. 2015년 9월 23일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57] 사실 그 해 우승팀 야쿠르트의 성적은 69승1무61패로 우승팀 치고는 그리 좋은 성적도 아니었고(그래도 일본시리즈에서는 세이부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물러섰다.) 1위와 최하위간의 게임차가 '''9.0게임'''밖에 나지 않았다. 1위 야쿠르트와 4위 히로시마와는 '''3.0게임차'''였고 히로시마조차도 66승64패의 성적으로 우승을 노릴 정도로 대 난전이었다. 이 해 한신도 67승 2무 63패로 2위팀 치고는 승률이 높은 편도 아니었다. 그나마 그 2위도 요미우리하고 공동 2위였다. 참고로 이해 감독은 나카무라 카츠히로. 그리고 이 성적이 나카무라가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5년 7개월이라는 팀 역사상 최장수 임기를 기록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58] 여담으로 괴짜가족의 작가 하마오카 켄지의 작품인 4학년 1반 차렷!에서 소재로 썼는데, 그 해 센트럴리그 우승 팀을 응원한 캐릭터는 '''11권 단독 표지 출연'''이란 상이, 꼴찌 팀을 응원한 캐릭터는 '''1달간 출연 정지'''라는 벌칙이 걸렸다. 참고로 주인공 카나가와 켄은 한신을, 반장은 야쿠르트 스왈로즈, 키요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부는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를, 히데노야 분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코지는 주니치 드래곤즈를 응원했다. 참고로 분타는 오사카 출신인데, 한신은 역시 무리라면서 카프를 응원했다.[59] 하지만 노무라 감독 시절에도 '''3년 연속 꼴찌(666)'''를 찍을 정도로 성적은 썩 좋지는 않았다. 결국 이 성적과 아내 노무라 사치요의 탈세혐의로 인한 체포 등이 악재로 겹치며 노무라는 2001년을 끝으로 감독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이 3년 연속 꼴찌 대신의 리빌딩이 막장이던 팀을 재건시켰다고 재평가받으며 최근 평은 그닥 나쁘지 않다.[60] 일본시리즈에선 '''요미우리 자이언츠 OB이자 영구결번 No.1''' 오 사다하루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게 3승 4패로(2연패-3연승-2연패.) 패배하고 말았다.[61] 승률 5할에 근접한 4위가 뭐가 안습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2011년의 한신은 시즌 전 전문가들의 예상에서 거의 만장일치의 우승후보였다. 게다가 이미 한신이 '''그 요미우리를 제치고''' 팀 연봉지출 1위까지 먹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리멸렬한 경기 내용으로 4위에 그쳐 시즌 막판에는 고시엔에서 열리는 홈경기에서 관중동원 2만명 대를 찍는 등 팬들의 불신도 커진 상태였다. 한마디로 2011년의 두산 베어스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62] 참고로 라이언 보겔송의 아내인 니콜은 한신 타이거스 구단 CF(정확히는 고시엔 구장에 주차가 어려우니 자사 전철을 이용해라는 광고)에도 출연했다.[63] 그 외에는 팀에서 수석코치를 한 번 역임했으며 2010년까지 2군 감독으로 2군팀을 우승으로 이끈 한신의 프랜차이즈 유격수 스타 히라타 카츠오가 강력한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이쪽도 구단 OB이고 외압에 의해 2군 감독에서 강제로 물러나야만 했다. [64] 이 해 1선발 랜디 메신저, 2선발 노미 아츠시 모두 '''승패마진이 0이거나 마이너스였다.'''[65] 8연패+히로시마전 열세[66] 2017년 한신 타선은 요미우리 OB 스즈키 타카히로도 CS 직전 "(타선의) 폭발력이 없다"라는 평가를 했을 만큼 중요한 경기에서 타선이 안 터졌다.[67] 심지어 요미우리 팬과 연애라던가 결혼도 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을 정도다.[68] 엄밀히 말하면 저 쿠타바레는 '뒈져버려'에 가깝다.[69]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대표응원곡 도쿄온도의 후렴구에 끼워맞추는 것과는 별도의 응원곡(?)으로 응원단 공식 레퍼토리에 가깝다. 물론 야쿠르트 원정에서 도쿄온도를 스틸해 버리는 건 기본. 심지어 퍼시픽리그 팬들이 더 크게 따라 부르는 경우도...[70] 속칭 '상혼을 담아(商魂こめて). 물론 요미우리 응원가를 저런 식으로 부르는 건 한신팬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팀 팬들도 똑같다. 심지어 명색이 요미우리와 한 편으로 묶이는 올스타전에서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라 요미우리'와 '요미우리 쓰러뜨려'를 부른다. 댓글에서는 '''방송사고가 아니고 정상방송'''이라는 드립을 쳤다. 즉 '''맨날 저런다는 것.'''[71] 2차 대전 이후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 중에 유일하게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엄청난 투수다.[72] 다만 무라야마 미노루와 요미우리 OB인 나가시마 시게오와는 서로에게 경의를 표할 만큼 각별한 사이였고, 무라야마의 장례식 때 나가시마 감독은 구장에서 먼 거리를 달려와 장례식장까지 와서 눈물로 애도를 표했다.[73] 안티 요미우리의 선봉장 호시노 센이치도 요미우리 OB와 사이좋게 지내고 백스크린 3연발의 주인공 카케후 마사유키와 당시 홈런을 맞은 투수 마키하라 히로미가 사이좋게 방송에 같이 나오는 등 한신 OB와 요미우리 OB들 간의 관계는 상당히 좋은 편. 선수들도 시즌 끝나고 같이 밥 먹으러 가는 등 관계가 좋은 편이다. [74] 게다가 킨키 그레이트링의 당시 연고지는 한신과 겹치는 오사카였다. 킨키 그레이트링은 지금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현재 연고지인 후쿠오카에 이전한 건 1989년부터이다.[75] 도쿄권 방송국은 와이드쇼와 저녁뉴스에서 한국의 종합편성채널처럼 지역소식 없이 같은 전국뉴스만 계속 틀어줘서 시청자들이 짜증내기도 하는데, 기요하라 가즈히로 각성제 파동 때는 이 소식이 너무 심하게 다뤄져 시청자들이 불평하기도 했다.[76] 단 한큐한신홀딩스가 대주주기도 한 간사이TV는 아침에 후지TV의 '메자마시TV'를 그대로 방송해서 제외. 대신[77] 두 방송국 모두 JRN, NRN 네트워크를 사용하여 전국에 한신 주최 경기를 제작, 전송한다.[78] 한신 홈경기와 인터리그 인터넷 유료 중계는 한신 구단 자체에서 제공하는 '토라테레(虎テレ)' 서비스 또는 2018년부터 요미우리를 제외한 11개 구단의 공동 중계 플랫폼인 DAZN을 이용해야 한다.[79] 정반대 사례가 오릭스 버팔로스. 이쪽은 NHK를 제외한 지상파 방송에서 아예 중계를 안 하는 상태라 유료방송 서비스 가입이 필수다.[80] 히로시마판의 경우엔 히로시마 도요 카프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뤄 준다.[81] ブレないデイリー(부레나이 데이리)[82] 사실 스포츠지에 웬만하면 정가 소식이 오를 이유는 없으므로, 그냥 무슨 일이 벌어지든 한신이 1면이라는 사실을 우스갯소리로 표현한 것에 가깝다. 그러나 2009년 정권교체 당시에는 정권교체의 임팩트가 너무 커 스포츠지들도 스포츠 소식 제끼고 정권교체 소식을 1면에 실었는데, 정권교체 당시 요미우리전에서 토리타니가 홈런을 치는 소식을 1면에 실으면서 '''G민당''' 드립을 친 적은 있는데, 정작 도쿄는 선거철이면 23구 서부 및 외곽지역을 중심으로 우경화된 오사카보다 반자민당 표도 더 많이 나온다.[83] 이로 인해 SMAP 해산 공식발표, 아라시 2021년부터 활동중단, 니시코리 케이 동메달 등의 뉴스로 인해 한신 소식이 1면이 안 되면 화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2019년 3월 21일 '''스즈키 이치로 은퇴'''는 거의 모든 스포츠신문과 일간신문이 이치로 은퇴를 1면에 실었을 정도로 그 임팩트가 상상을 초월하였다. [84] 그러나 도쿄판의 경우 한신팬이 간사이 지방에 비해 적어 다른 스포츠신문과 비슷하게 가는 경우도 많다. 이 실례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간사이권에서 스프링캠프 당시의 활약으로 1면에 실렸으나 도쿄판에서 1면에 실리지 못하고 맨 뒷면에 실린 윌린 로사리오.[85] 즉, 명목상 연고지가 오사카일 때에도 니시노미야에서 홈경기를 했다. 홈구장 안 옮긴 다른 팀은 막내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익히 알려진 것만 해도 자이언츠는 고라쿠엔 구장에서 도쿄돔으로, 주니치는 나고야 구장에서 나고야 돔으로, 도쿄 야쿠르트는 고라쿠엔을 같이 쓰다 메이지진구 야구장으로, 히로시마는 현 홈구장으로 옮기기 전에 이미 히로시마 종합 구장에서 히로시마 시민 구장으로 옮긴 바 있다. 나머지 구단들은 연고지 자체를 옮겼으니 말할 것도 없고.[86] 올해야 말로 우승이라던 한신 팬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고, 33-4라는 아름다운 스코어는 타 구단 팬들에게 한동안 놀림거리가 되었다. 어떤 선수의 방어율이 3.34이거나 타율이 0.334거나, 어떤 경기의 경과시간이 3시간 34분이거나, 3년만의 34회째 센트럴리그 우승이라거나 여튼 한신이든 아니든 야구 관련해서 334라는 수열이 들어가면 なんでや!阪神関係ないやろ!(머꼬! 한신 상과읎다카이!)라고 달아주는 식. [87] 합스부르크 가문 문장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구단의 엠블럼 역시 같은 형태다. [88] 그것 말고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돈지랄에 실망해 반 요미우리 성향이 강한 한신 타이거스 팬이 되었다고 한다. [89] 방송, 예능, 성우, 가수, 아티스트 등 미디어계에서 유명한 한신 팬들이 직접 롯코오로시를 부르는 영상으로, 2017년 시즌 초반에 촬영하였다.[90] 정말로 양키스가 다나카 마사히로 이전까지 일본인 투수를 영입하기 주저했던 이유가 이가와 때문이었다.[91] 업무중 실수를 해서, 보고를 하다가 혼날 걸 걱정하는 다른 사원에게 각각 한신이 대승했을 때와 대패했을 때를 골라서 보고를 하라고 조언해 준다. 결과는 '''대승으로 기뻐해서 그런 사소한 일은 관대하게 넘어가'''는 것과 '''충격적 대패로 인한 허탈감에 그딴 사소한 일에 열 낼 기력도 없다'''였다. [92] 한국 더빙판에서는 한신과 요미우리가 각각 롯데, LG로 로컬라이징되었다. 한국 한정으로 서로 놀릴 처지가 아닌 건 방영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LG나 롯데나 못 하는 건 똑같았기 때문.(...) 여담으로 일본의 한신 타이거즈나 한국의 롯데 자이언츠나 어차피 둘 다 못 하는 팀 취급받는건 똑같다.(...)[93] 스타킹과 왼쪽 소매의 구단기에도 들어가 있는 호랑이 마크 제외. 이마저도 호랑이 마크는 2001년에 잠시 회색으로 바꾼 적이 있었다.[94] 대표적으로 이승엽의 한일통산 400호 홈런의 희생양이 되었다. 또한 이승엽이 일본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뽑아낸 상대팀이 한신 타이거스.[95] 양국 언론에서도 묵직한 직구위주의 투구를 하는 둘을 동일시 취급하는 경우가 많으며 두 선수도 서로에 대한 언급을 몇 번 한 적이 있다.[96] 농담이 아니라 요미우리 TV 방송, 아사히 방송에선 오승환의 활약상을 로컬 아침방송 스포츠 코너에서 하이라이트로 보여주곤 했으며, 스포츠신문 1면도 한신 위주로 나온다. TV에서는 한신의 활약을 아침 4시 반부터 1시간에 10분 단위로 스포츠코너를 통해서 볼 수 있다.[97] 한신 구단은 본의 아니게 소대수 아나운서의 인생을 바꿔놓기도 했는데, 원음방송 등에서 아나운서를 하다 오승환의 한신 입단을 계기로 인터넷방송으로 전직하게 되었다.[98] 대신에 엠스플에서는 한국 프로야구팀과 일본 프로야구팀의 연습경기를 중계해 주기도 하는데, 오키나와 리그에서 한신과 KIA 타이거즈의 경기를 중계해 주기도 했다.[99] 키움 팬들은 지난 2시즌 동안의 활약 및 기대에 못 미치는 테일러 모터의 영입으로 인하여 당연히 아쉬워하고 있고 한신 팬들은 우려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사유가 부실 외야뎁스+로사리오의 재래 우려. 그래도 한신 팬들은 후쿠도메 코스케, 이토이 요시오 등에 비해 기대해 볼 만 하다며 샌즈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다.[100] 롯데에서는 통산 4년간 41경기에서 2승 2홀드 ERA 6.85를 기록한 불펜투수였다.[101] 등록은 포수로 되어있으나 주전 내야수로 출장중이다.[102] 준수한 외모로 일본 내 얼빠들이 많은 선수 중 하나. 허나 사마귀를 연상케하는 특유의 타격 자세로 국내 넷상에선 영원히 고통 받고 있다.[103] 한신의 1라운더 잔혹사 중 한 명. 게이오기주쿠대학의 주장을 맡던 잘나가는 외야수로 한때는 여러 구단의 주목을 받았으나, 공수주 모두 미달이라는 이유로 한신을 제외한 다른 구단들은 아예 관찰을 그만둔 상태였다. 심지어 한신 스카우터들조차도 동일본 쪽 스카우터들은 타카하시 슈헤이를, 서일본 쪽 스카우터들은 타케다 쇼타를 1라운더로 추천했는데도 케이오대 선배였던 구단 사장이 독단적으로 1라운더 지명을 결정해버린 케이스. 덕분에 학벌로 1라운드 지명을 받았다고 신나게 까였고, 예상대로 프로에 와서 공수주 모두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부진하고 있다. 똑같이 망한 1라운더 취급받는 타카야마 슌(2015년 1라운더 및 2015년 신인왕)이나 오오야마 유스케(2017년 1라운더)는 망했다고 까이기는 해도 주전 한 자리 정도는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판인데 이 선수는 30대가 되도록 백업 외야수에 그치고 있다.[104] 빠른 발을 갖고 있다면서 9시즌 동안 1도루를, 장타력을 갖고 있다면서 9시즌동안 10홈런을 기록했으며 수비는 타구판단 능력이 좋지 않아서 공이 휘는 코너 외야수로 나가면 툭하면 히 드랍 더 볼을 시전하는 수준이고(이런 케이스는 사실 종종 나오는 편이다. 그래서 중견수는 보는데 좌익수, 우익수를 못 보는 특이케이스. 한국에도 이택근이란 예시가 있다.), 무리하게 공을 쫓아가다가 다른 선수와 부딪혀서 6개월짜리 부상을 팀메이트에게 입힌 적도 있었다.[105] 본명은 후지카와 슌스케(藤川 俊介)이지만 성이 투수 후지카와 큐지와 겹친다는 이유로 등록명을 성이 아닌 이름으로 등록.[106] 리포트에 따르면 1999년 다저스 산하 마이너에서 뛰던 시절 폴 로두카 등과 함께 약물을 복용했으며 한신 시절이던 2004년 12월 10일자로 약물 공급책인 커크 래돔스키에 보낸 수표가 발견되었다고. 다만 2004 아테네 올림픽 호주 대표팀의 일원으로 약물 검사를 통과했으며 한신 구단 측의 주장에 따르면 06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약물 검사도 통과했다고 한다.[107] 세실 필더는 한신에 오기 전에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전한 경력이 있으므로 제외한다.[108] 다만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으로 인해 한신 팬들 사이에서는 흑역사로 취급되는 분위기인 것 같다. 도박 자체보다는 조직폭력배와 연루되었다는 사실 때문에.[109] 거포인데 선구안과 컨택도 나쁘지 않다 블라블라...하면서 설레발을 쳤는데 140km 수준의 느린 직구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110] 일본에서는 돈 블레이저(Don Blazer)로 줄여서 불렀으나 본명이 블레이싱게임이다. 따라서 이 분만 영어 스펠링을 같이 표기한다.[111] 총 재직연수로 따지면 나카무라보더 더 많은 연수를 재직한 감독도 있지만 단일 임기로는 팀 역사상 최장이다. [112] 바로 위 후지타 타이라의 해임으로 인한 대행이지만 일본어 위키에서는 정식 대수로 세고 있다. 따라서 대행이 아닌 27대 감독이 되는 셈.[113] 볼드체는 일본시리즈 우승[114] 양대리그 분리 이후 성적만 서술